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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커플의 결혼이 진짜 통일이다”

통일인터뷰.jpeg

 

 

2018년 여름, 남한 사회에 탈북민이 더 이상 희소성의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탈북민들이 일상에서 일반 국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모습이 TV나 신문, 라디오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정착금과 주거지를 받아 당당한 국민이 된 탈북민들은 국민의 기본의무 중의 하나인 납세의무를 성실히 지키며 살아간다. 물론 북한에서 짐승처럼 살던 자신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받아준 남한정부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3만 2천여 탈북민 중 80%가 여성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많은 탈북여성들이 남한 남성과 결혼을 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7천만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먼저 이룩하였다. “한반도에서 남북커플의 결혼이 진짜 통일” 이라며 탈북여성과 남한남성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애쓰는 중매전문가가 있다. 얼마 전 경기도 광명시 모처에서 한유진 ‘남북러브스토리아’ 대표를 만나 남북통일 결혼이야기를 들어봤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83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진제강소 축구구락부 지도원이었고 어머니는 제강소 선전대(예술단) 대원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10살 때 지병으로 사망했고 형제는 남동생이 있다. 우리 남매는 할머니 집에서 살았는데 2000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할머니가 계속 나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하였다. 중국 조선족 태생인 조부모님은 6·25전쟁 때 북한을 지원하려고 이북에 넘어왔다.

 

- 중국으로 가라는 이유가 뭔가.

할머니에게 5명의 자식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맏이고 맏딸(내게는 고모)이 이과대학(수재학교)을 졸업하고 모 기관 연구사로 일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모든 직위를 해임, 가정주부로 전락된 사실에 할머니는 “세상에 이렇게 여자를 천대하는 사회도 있는가?” 하며 분통을 느꼈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고 젊었으니 중국에 가서 그 곳에 있는 친척들과 함께 살라”고 했다.

 

- 그게 탈북의 계기가 되었나.

2001년 1월, 단신으로 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 발을 디딘 순간 중국국경 경비대에 체포되어 즉석에서 북송, 온성보위부를 거쳐 청진보위부에 이송되었다. “중국인줄 모르고 넘었다”고 고집한 19세인 나를 어리다고 판단한 보위부는 석방시켰다. 집에 오니 할머니가 “바보처럼 왜 잡혔냐? 다시 가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할머니는 내색은 안했지만 북한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그날로 집을 나섰다. 탈북경험이 있는 언니를 만나 무산에서 어느 날 밤 두만강을 건넜는데 뒤에서 북한경비대가 중국 쪽에 대고 총을 쏘며 우리를 추격해왔다. 그 언니는 성공했고 나만 잡혀 다시 무산보위부로 이송되었다.

네 번째로 탈북할 때는 수면제 50알을 준비하고 시도했는데 또 붙잡혀 보위부에서 취조도중 삼켜버렸다. 그런데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3일 만에 깨어났다. 북한 수면제는 가짜이거나 효과가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몇 번의 탈북 끝에 대한민국으로 왔는가.

10대 후반 시절인 2001년 1월부터 2년 4개월간 모두 네 번에 걸친 도강과 체포, 북송, 집결소와 단련대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내가 태어난 조국인 북한은 정말 사람 못살 곳임을 알았다. 고난의 행군시기 청진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씩 굶어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도저히 북한에서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2003년 4월 초 회령에서 친구와 함께 탈북했다. 다섯 번째다.

두만강을 건너 브로커가 준비한 차를 타고 2~3시간 달려 연길시 소재 친척집에 도착하였다. 허나 탈북자 신분이니 항상 불안했다. 연길 시내에서 한국관광객 가이드 하는 4촌 오빠로부터 한국이 남조선이라는 것도 알았다. 중국 사람들도 가고 싶어 하는 한국이지만 나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인데 내가 4번이나 북송되어 고문과 강제노동을 받았던 북한의 악몽이 되살아나서였다.

 

-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

7년 동안 중국 연길에서 숨어 있으며 친척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런데 나와 함께 네 번째로 탈북하다가 성공한 언니가 그 사이에 한국으로 먼저 갔었다. 어느 날, 그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는 중국 어디에 있다며 나를 찾았다.

후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전화했고 자기와 두만강을 함께 건넌 동지여서 꼭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고파 했다고 한다. 언니는 무려 6개월간 나를 설득시켰고 2009년 3월에 연길을 떠나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7월에 한국으로 왔다.

 

- 사회에 나와서 무슨 일을 했나.

27살이었다. 주변의 선배 언니들로부터 “남한에서 시집 잘 가는 것도 정착의 지름길” 이라며 결혼정보업체 회원가입을 권장 받았다. 틀린 소리도 아니기에 모 결혼정보업체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 분야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로 결혼을 원하는 남녀를 중간에서 잘 골라 연결시켜주는 일이니 흥미가 갔다. 그래서 내가 가입한 첫 달에 2명, 둘째 달에는 6명의 남성회원(남한사람)을 회사에 소개시켰다.

 

- 좀더 자세하게 말해 달라.

모 결혼정보업체는 직원이 15명이었고 나는 거기서 홍보팀장으로 2009년부터 7년간 근무를 하였다. 도중에 결혼을 하여 출산 및 육아휴직을 1년간 했는데 그 사이에 직원은 물론 급여도 절반으로 줄었고 나도 사표를 썼다.

내가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애정을 갖고 한 일인데 계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2016년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지금의 회사인 ‘남북러브스토리아’를 설립하였다. 현재 직원은 나를 포함하여 4명이 있고 회원 수는 2000명 안팎이다.

 

- 회원 중 인상에 남는 커플이 있다면.

나이 32세에 여섯 살 난 딸이 있는 남성회원(남한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아내가 집을 나가버렸다. 29세인 탈북여성과 선을 보고 결혼 후 아들 두 명 낳고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고 있다. 남편은 외동딸을 자기 딸 이상으로 키워주는 아내(탈북여성)를 만나게 해준 ‘남북러브스토리아’에 늘 고맙다고 한다.

 

- 실망스러운 커플도 있었겠다.

40대 중반 남성회원(남한사람)은 버스기사였다. 딸 2명이 있는 이혼남이다. 같은 40대 탈북여성과 맞선을 주선시켰고 결혼까지 하였다. 아내가 7년간 성실히 내조한 덕분에 그동안 1대의 버스가 4대로 늘어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을 청구했고 행적도 감추어버렸다.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40대에 많이 흔들린다고 들었다.(웃음) 아마 바람이 난 모양이다.

 

- 일하면서 손맥이 풀리는 때는.

기가 막힐 때가 종종 있다. 50~60대 남성회원(남한사람) 중 일부가 상담 중에 “나는 50대 중반의 공무원인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30대 여성을 원한다.” “나는 60대 후반인데 가급적 40대 중반 여성을 원한다”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겠는가? “여기는 예쁘고 용감하고 생활력이 강한 탈북여성전문 결혼정보업체이다. 선생님이 정 그런 조건의 배우자를 찾으시거든 저기 동남아전문 결혼정보업체에 가보시는 것이 타탕할 것 같다”며 단번에 사절했다.

 

- 하는 일이 보람되게 느껴지는 순간은.

결혼에 골인하는 통일커플(탈북여성과 남한남성)이 뭇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예식장에서 맞절하는 순간이다. 탈북여성들은 대부분 친인척이 없이 홀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내가 신부엄마자리에 가끔 앉는다. 천륜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결혼으로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볼 때마다 직업의 자긍심을 한껏 느낀다.

 

- 한 대표의 회사경영 철학은 뭔가.

재미있어 시작했던 이 일(결혼중매)이 올해로 벌써 10년째이다. 아무래도 천직인 것 같다. 나는 직원들에게 “우리와 같은 탈북여성회원을 내 언니, 내 동생으로 생각하고 남성회원은 내 형부, 내 제부가 될 분들로 생각하자”며 격려한다. 중매로 남을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언니, 동생을 결혼시킨다는 마음으로 일할 때 따뜻한 마음과 진정성이 나온다고 강조한다. 또 일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나는 회사경영을 이윤 창출과 사회봉사로 고집하고 있다. 작년에 탈북민자녀 방과 후 공부방인 ‘겨레얼학교’(지역아동센터)에 후원계약을, ‘북한민주화위원회’와 MOU를 맺었다. 내가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음은 남편(남한사람)이 잘 도와주기 때문이다. 지방에 자그마한 땅을 갖고 있다. 거기에 미혼모 생활공간, 귀농정착을 포함한 탈북민들의 종합쉼터를 만들 계획이다. 어렵지만 꼭 해보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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