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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인민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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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서 볼 때 북한은 신비로운 사회가 분명하다. 수령인 최고지도자의 지시 한마디에 2천만 주민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민·관·군 할 것 없이, 평양에서 북변의 두메산골, 서해의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북한에서는 전체 주민이 평생토록 의무적으로 해당 연령대의 조직에 가입되어 정치 및 사상생활을 한다. 주로 수령우상화 학습 및 강연, 사회주의우월성 교양, 수령 동상 참배, 외부세계(남한과 미국 등) 성토모임 등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북한주민들이 노동(학습)과 업무장소인 조직에서 생활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여가생활과 휴식처인 가정과 사회에서는 어떨까? 거기서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대표적으로 주거지에서의 의무적인 인민반생활이 그렇다.

북한주민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전부 당국의 시시콜콜한 관섭과 통제 속에 산다. 얼마 전 북한의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인민반장’을 했던 조선인민군 군관(장교)출신 차경숙 통일교육전문강사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 자신을 소개해 준다면.

1955년 7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7남매 중 둘째였고 아버지는 군인(대좌,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근무), 어머니는 주부였다. 1972년 3월 장산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대에 입대하였다. 평양의학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굳이 인민군대에 탄원한 것은 ‘영예스러운’ 조선노동당원이 되기 위해서였다.

입대한 부대는 공군사령부 소속 80로켓여단(황남 재령군 주둔)이다. 3년간 병사(사병)생활을 하고 3개월 군관학교강습을 받았다. 이후 후보당원의 자격을 취득하고 소위로 진급하여 본 여단 1대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 당시 인민군대 물자 공급은 어떠했나.

내가 군사복무를 한 1972년부터 9년간의 실태는 이랬다. 식량배급은 병사 1인당 800g백미였고 부식물 60%는 국가가 보장해주었고 40%는 부대자체로 해결하는 체계였다. 그러니 상부로부터 “각 대대, 중대 별로 돼지를 기르라! 염소를 기르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번 명절부식공급 돼지고기는 어느 중대에서 맡으라는 식이다. 하면 기르는 돼지가 시원치 않으면 민가에 나가 도둑질해오기도 했다.

 

- 여군 생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당시 로켓여단은 북한군에서 유일하게 혼성부대였다. 부대 훈련 중 고공사격은 로켓으로 남군이 맡고 저공사격은 37미리, 14.5미리 고사포로 여군이 맡는다. 대대에 남군 180명이고 여군 65명인데 대략 3:1 비율이다.

재밌는 것은 정치상학(군인사상학습)과 오락회시간 때 남녀군인이 서로 반기는 눈길과 표정만 보여도 주변에서 “눈이 맞았다!” “풍기문란하다!” 등의 욕설이 돌았는데 심지어 식당화구당번을 서는 남군에게도 그랬다.

 

- 언제부터 사회생활을 하였나.

1980년 6월에 제대하여 평양시 선교구역 수산물종합상점에 배치를 받았다. 당시만도 평양시민에게 겨울철 가정마다 동태 20kg(명절 때 1kg), 다시마, 미역 등이 배급되었다. 제대하여 이듬해 결혼하고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애를 키우며 직장생활하기 보통 힘들지 않아 좋은 직업이었지만 7년 뒤에 사직했다. 수산물종합상점이 비생산단위(제조공장이 아님)여서 각종 사회동원이 많았다.

 

- 이후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꿈 많은 처녀시절 군사복무를 하면서 자랑스럽게 취득했던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원증’이 애물단지라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웃음) ‘당원’이기에 시장에 나가 장사도 하지 말아야 하고 더구나 집에서 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할까? 하고 고민하던 중 동사무장과 분주소장의 공동추천으로 ‘인민반장’이 되었다. 쉽게 된 것은 바로 ‘당원’이기 때문인데, 그게 사람을 울고 웃기게 한다. 평양시 선교구역 산업1동 제22인민반(35세대, 가호) 반장이었다.

 

- ‘인민반’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굳이 비교한다면 남한의 통·반과 비슷한 인민반은 북한의 최말단 행정보조 조직으로 보통 30∼40가구로 구성되었다. 상급기관은 해당 구역(남한의 구) 인민위원회이다. 수시로 하는 인민반회의에서는 당의 지시전달, 노동력동원, 마을청소, 공공질서유지, 사고예방대책 등을 토의한다. 인민반장은 유급일군(공무원에 준하는 사람, 공무원의 80%에 해당하는 식량배급과 40%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음)이다.

- 인민반장의 하루 일정은.

매일 오전 9시 동사무소에서 사무장 혹은 동당비서가 주재하는 ‘인민반장회의’가 있다. 노동신문 독보를 시작으로 일일과제를 받는데 주로 무슨 지원물자 내라는 소리이다. 대략 한 시간 가량 반장회의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각 가정을 돌며 출근은 했는지? 인민반 내에 별다른 일은 없는지? 등을 점검하고 그날 과제물 수행을 위한 계획 등을 수립한다. 그 결과는 저녁 4시에 다시 동사무소에 나가 사무장(안보관련 건은 분주소장)에게 보고한다.

 

- 숙박검열, 가스검열 등은 뭔가?

숙박검열은 외지손님이 친척인 어느 집에 묵겠다는 이유를 밝히고 인민반장한데 승인을 받는 것이다. 인민반장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즉석에서 승인을 하고 그것을 동분주소(파출소)에 가서 보고한다. 가스검열은 모든 가정이 겨울철이면 석탄을 때는데 간혹 석탄가스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방지하는 순찰이다. 밤 12시, 새벽 5시 경에 각 가정을 돌며 “탄내 안 나요?” 라며 안전을 확인한다.

 

- 반장의 역할 중 또 어떤 것이 있는가.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거의 해마다 진행하는 ‘100만 평양시 군중시위 및 열병식’이 있다. 또한 외국정상 및 대표단이 입성할 때 시내도로에서 펼치는 환영행사가 있다. 여기에 참가할 인원들을 선별하고 환영도구 등을 준비한다.

그뿐이 아니다. 해마다 인민군창건절을 맞아 군대원호물자(치약, 칫솔, 수건, 비누 등)를 집집마다 걷어서 동에 바친다. 농촌동원 계절에는 각종 작업도구를 수집해 바치고 평양시내 각 건설현장을 다니며 충성선동을 해야 한다.

 

-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고 이듬해 5월부터 평양시 식량배급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인민반장회의’에서는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경제제재 때문이며 앞으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있을 것이니 조금만 참아라!”고 했다. 매 인민반에서 두 가정씩 선정해서 구역에 보고했더니 그 집만 식량을 2~3일분씩 공급했다. 우리는 능쟁이풀을 옥수수밥에 섞어 먹었는데 신체가 퉁퉁 부어올랐다.

 

- 탈북동기가 뭔가.

국가가 배급을 안주니 자식들을 굶기거나 영양실조로 허약자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 18살인 큰 딸을 함북도 무산에 있는 친척집으로 식량구입 보냈다.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내가 작은 딸을 데리고 무산으로 갔다.

와보니 큰 딸은 중국으로 돈벌이를 간다는 것이 인신매매를 당했고 나와 작은 딸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너무 배고 고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태세였다. 그것이 1997년 10월이었고 첫 탈북이었다. 이후 두 번이나 북송되었고 노동단련대, 집결소에서의 고초를 겪었으며 다시 탈북하여 중국에서 6년을 보냈다.

 

- 헤어진 큰 딸을 찾았나.

중국에서 2001년 2월 <송화강잡지>에 300위안을 내고 딸을 찾는 광고를 실었다. 다음해 12월 전화가 왔고 6년 만에 헤어졌던 딸을 만났다. 이후 중국에서 노래방주방, 과일장수 등을 하면서 돈을 북한에 보내 아들까지 탈북시켰다. 중국에서 탈북자 신분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2003년 3월 청도를 출발하여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그해 6월 가족이 모두 남한으로 왔다.

 

-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는가.

지난 2004년 8월과 10월 워싱턴 미국의회에 가서 탈북여성들의 인권상황을 생동하게 증언하였다. 내가 중국에서 6년간 딸과 함께 살면서 마치 동물처럼 이리 팔리고 저리 팔려간 끔찍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사실 그대로 말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자유북한방송, 자유아시아방송의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통일교육원에서 8주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통일교육전문강사’가 되었다. 북한군 장교출신으로 군부대장병 대상 안보강연에 가끔 나간다.

 

- 국군장병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

눈이오나 비가 오나 밤낮으로 차디찬 전호에서 조국의 영토를 지키는 영용한 국군장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여러분이 지키는 이 땅은 사람이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나라이다. 적어도 내가 처녀시절 9년간 군복입고 손에 총 들고 지켰던 전대미문의 독재국가 북한에 비해서 말이다. 5천만 국민이 주인 된 나라,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우리 대한민국을 금성철벽으로 지켜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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