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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까지 배에 싣고 탈북한 가족"

통일인터뷰.jpeg

 

3년간의 한국전쟁 휴전(1953년 7월) 이후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탈북(북한영토에서 벗어나 남한영토로 들어오는 것)이다. 탈남(탈북의 반대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탈북이 훨씬 더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다. 이는 어쩌면 실패한 사회주의 북한체제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단적인 실례가 아닐까 한다. 시대와 연대를 지나 탈북이유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북한사회에 자유가 전혀 없다는 것, 굶주림과 추위가 일상이라는 것,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장장 70여년 노동당독재 정권이 낳은 참혹한 현실이다. 탈북경로는 다양하다. 우선 북·중 접경지역의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영토에 진입하는 방법이 있다. 또한 지뢰가 매설된 군사분계선을 넘거나 동해 혹은 서해로 배를 타고 내려오는 방법도 있으나 매우 위험하다. 다음 필자처럼 합법적으로 해외(노동) 근무를 하다가 주재국 한국대사관을 통해 입국하는 경우가 있다.

대략 탈북민 90%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고 10%가 해외공관이나 군사분계선, 동·서해 바다로 남한에 입국하였다. 온 가족이 어선을 타고 바다로 입국한 박명호 탈북 1호 선주 겸 잠수부를 얼마 전 서울에서 만났다.

 

- 자기소개를 해준다면.

1965년 4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청진제철소 노동자였고 모친은 주부였다. 6형제의 맏이가 나다. 1981년 봄 청진포항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함경남도 장진군 주둔 제61비행추격기연대에 배치를 받았다. 여기서 6년간 근무를 하였으나 아쉽게도 1987년도에 부대가 해산되었다. 원산에 있던 미그 19호기 50대가 장진으로 이동, 일부 사단이 전단으로 바뀌는 등 공군개편이 있었다. 참고로 북한 전역에 15개 정도의 군용비행장이 있고 기본적으로 한 개 연대(부대)가 주둔해있다. 대대는 ‘구분대’라고 한다. 한 개 비행연대의 비행기 대수는 대략 50대 정도이다. 이를 보조하는 인력, 시설 등이 굉장하다. 각각 4개의 비행대대 및 기술중대, 1개의 경비 및 정비중대가 있다. 그리고 각각 1개의 운수중대 및 공병중대, 항형무선유선(레이더, 기술 분야) 중대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개의 폭탄관리 중대, 1개의 수뢰소대, 1개의 기상관측소대 등이 있으며 정규군인 1천 명에 군인 및 군무자 가족 600세대가 있다. 도합 2000~2500명이 2개의 행정 리(理: 마을)를 형성하고 있다.

 

- 부대가 해산되며 어떻게 되었나.

사단 직속 원유관리소로 조동이 되었다. 항공기와 그 보조시설 사용 원유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사단에는 보통 1만 리터 용량의 원유탱크 3~4개 씩 있다. 배치 받은 직무는 공병대대 부소대장, 1년 뒤 소위계급을 받고 군관(장교)이 되었다. 공병대대는 주로 비행장 및 레이더(탐지기 배치시설) 공사를 전문한다. 또한 새로운 비행기가 들어오거나 신형 레이더 시설로 교체 할 때면 어김없이 공사를 해야 한다. 훈련 중인 전투기에서 내뿜는 열량(자동차로 치면 배기가스)은 고열이어서 활주로가 적지 않게 파괴된다. 그러면 활주로를 개보수하거나 새로 공사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투기를 보존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인민군 비행기는 주로 어느 나라제인가.

연대가 보유한 주력전투기 90%가 러시아산 비행기이다. 경비행기나 직승기(헬기) 등 10% 정도는 중국이나 독일산이다. 북한은 헬기는 고사하고 경비행기도 생산 못한다. 모든 공군부대 전투기에는 항상 원유를 가득 넣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란, 이라크에서 들어오는 항공석유가 풍족했으나 90년대 들어서며 중동의 원유가 끊기었다. 이후로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들어오고 있는데 이때부터 전투기에 채우는 원유도 다소 차질이 빚기 시작했다.

 

-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전투기의 원유까지 뽑아서 쌀을 구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대에 가족까지 합쳐 한 달 식량이 80t이 소모된다. 일일 800g 정량이 500g으로 낮추어 졌고 모두 구분대(대대)별로 자체로 알아서 살게 되었다.

당시 나는 독립중대장으로 100명의 군인을 데리고 있었다. 다른 중대에서 1년에 20~30명의 영영실조가 나왔지만 나는 안 그랬다. 이유는 훈련과 상학(정치학습) 등을 조절했고 해상부업(바다에서 미역, 다시마를 수확하는 것)을 했다.

 

- 제대 한 후에 군무자로 근무했는데.

2000년에 들어서며 부대 행정관리는 자력갱생 체제로 돌아갔다. 부식물 해결은 알아서 해야 했다. 2004년 4월 대위로 제대하고 연대 해상기지장(민간인)이 되었다. 군인 70명, 민간인 30명이 있는 전문수산작업반이다. 참고로 사단, 군단에는 ‘수산사업소’가 있다. 원래 민간 기업인데 선군주의하면서 군대에 위탁되었다. 해상부업하면서 잡힌 고급어류는 연대장 이상 간부들이 가져간다. 정치부, 보위부, 참모부, 후방부 등 온갖 부서장들이 와서 들먹이는데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 언젠가 보위부장이 “그일 그 만해! 오래하면 재미없어!” 하는 암시를 주었다. 눈치를 채고 2005년 가을 퇴직했다.

 

- 퇴직이후 생활은 어떠했나.

당시 황해도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남동생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다. 그래서 내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구실을 대고 황해도로 이동승인을 받았다. 이후 황해남도 옹진군에 있는 호위국수산사업소 당비서로 일을 하였다. 직원이 500명 되는 수산사업소인데 수산물을 잡아 대부분 평양에 올려 보내거나 외화로 바꾸는 일 등을 한다. 해산물과 건어물을 중국에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에게 파는데 그것도 일종의 무역이라면 무역이다.

 

- 탈북할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간간히 바다로 작업을 나가 이어폰을 귀에 꼽고 소형라디오로 남한방송(KBS 사회교육방송)을 몰래 들었다. 그 결과 “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 갇혀있는 바보, 불쌍한 존재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서서히 들게 되었다. 무엇보다 두 아들을 생각하며 탈북을 고민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이들이 그 험한 세상에 살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인 나로서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아내와 진지하게 의논을 하였다. 천만다행히 아내가 공감했다.

 

- 탈북과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제대 당시 미리 준비했던 백두산 이깔나무 2t 정도로 배를 만들었다. 발전기, 원동기를 장착하니 제법 운행이 가능했다. 2006년 4월 25일 밤 9시에 장연 앞바다서 떠났다. 바다에서 장시간 표류를 예상하여 배에 이삿짐까지 싣고 온 가족이 승선했다. 다음날 동틀 무렵 백령도에 못 도착하여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 후 자연스럽게 평양에서 진행하는 당비서회의에도 참가했다. 그로부터 대략 한 달 뒤인 안개가 짙게 낀 5월 23일 대낮에 다시 출발(탈북)하였다. 인민군이나 국군 레이더에 잡히지 않도록 배 위는 전부 이불이나 천으로 덮었다. 꼬박 이틀을 보내고 5월 25일 오후 2시 인천시 옹진군 덕정면에 도착하여 귀순신고를 했다.

 

- 남한에서 사회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2006년 10월, 아내와 두 아들인 우리 식구가 정착한 곳은 경기도 용인이었다. 내가 42살 나이에 한국에 왔으니 일자리 잡기가 정말로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건설현장과 이삿짐센터, 가구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다음해 봄,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돼지목장 일을 2개월간 하였다. 그것도 적성에 안 맞아 제주도에 내려가서 2개월간 남의 배를 타고 일을 했다. 재수 없이 악덕업자여서 월급도 못 받고 다시 용인으로 올라와 고민했다.

 

-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남한에 와서 제일 밑바닥부터 하나씩 배운다는 각오로 농장일도 하고 바다의 배도 타보고 했는데 결국은 실패했다. 그래서 아주 신중하게 “초심으로 돌아가자! 내가 잘 아는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자!”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가족과 토의해서 2007년 가을 강원도 고성군으로 이사했다. 2010년 봄 그동안 번 돈을 털어 배를 샀고 큰아들에게 조타를 맡겼다. 내가 잠수부가 되었고 아내는 육지에서 ‘청진호 횟집’을 운영한다. 작은아들은 대학생이다.

 

-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일출 전 바다로 나가 어로작업을 하고 정오 전에 마친다. 잡히는 어류는 문어, 성게, 전복 등이다. 하루 잡는 어류는 대략 적으면 100만원, 많으면 300만원 상당이다. 한 번 잠수하면 2~3시간 만에 물 위로 올라오고 여름에는 월 24일, 겨울에는 20일 정도 바다에 나간다. 오후에는 식당에서 아내의 일을 도와준다.

 

- 고마운 분들이 있다면.

내가 잡는 신선한 해산물을 구입해주는 고객들과 식당을 찾아주는 지역주민, 관광객들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해산물을 잡아도 그것을 팔지 못하면 헛수고이다. 식당도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으면 당장 문을 닫아야겠지. 특히 지역에 거주하는 실향민, 2세, 3세 분들이 꾸준하게 식당을 이용해주시니 정말 고맙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남한정착 초기 길지는 않지만 다양한 일을 해보았다. 땅위에서 정착이 안 되어 땅속(돼지목장 하수구 청소일)도 들어 가보고, 물 위(제주 고기잡이 배 승선작업)에서도 노력해보았다. 그래도 안 되어 지금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요즘 젊은이들은 뭔가 해보다가 안 되면 쉽게 포기하는데 인생은 아름답고 강인한 도전이라는 사실 부디 잊지 말고 지속적으로 해보기 바란다. 내 경우를 봐도 북한에서 자가기 했던 일을 계속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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