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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탈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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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2천만 인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간부든, 노동자든, 군인이든, 학생이든, 주부든 똑같이 수령사상 학습 및 정치 조직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매주 각자 소속 조직에서 하는 생활총화(사상검증회의)도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전체 인민을 평생토록 노동당 감시 속에 두고 끊임없는 학습과 강연, 총화 등으로 엄격하게 관리 및 통제를 하는 것이다. 해외서 일하는 외교관도 예외가 아니며 특히 전연초소에 근무하는 군인은 더욱 그러하다. 태어난 고향이 수령을 비판해도 총살하지 않고, 외국 출판물을 보아도 괜찮고,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라도 자유롭게 이동해도, 하여 일하고 세끼 밥을 먹고 사는 사회라면 과연 목숨 걸고 그 곳을 뛰쳐나올 탈북민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탈북민들에게 있어서 탈북스토리는 하나 같이 영화 같고 소설 같다. 그만큼 극적인 장면이 많다는 소리다. 얼마 전 서울 구로구 지하철 대림역 근처에서 서울교통공사에 근무하는 한용수 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75년 6월 함경북도 연사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2남 1녀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함흥시구강예방원 의사였으며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인 어머니는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나를 낳고 주부로 생활하였다. 우리 집은 1987년부터 함흥으로 이사를 하였고 거기서 계속 살았다.

 

-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나.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는 리비아건설 북한회사에 의사로 파견되어 나가 근무했다. 귀국해서 아버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외국실정’을 안주로 이야기를 할 때면 나도 몰래 귀가 기울어졌다. 물론 정치적인 소리는 들은 적 없다. 보통 그 나라의 도시풍경, 사람들의 물질생활, 생활수준 등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 조선(북한)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위대한 수령’을 두 분씩이나 모시고 사는데 리비아보다 생활수준이 낮은가? 정말 이상하다.”

 

- 또 다른 추억이 있다면.

외삼촌이 평양과학백과사전출판사 사장이었다. 방학 때면 평양에 있는 외삼촌 집에 가서 놀기도 했다. 사진첩에는 외삼촌이 여러 구라파사회주의나라에 출장 가서 외국인들과 업무와 휴식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무척 부러웠다. 외국사람들의 얼굴에는 낭만적인 미소와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 인민군대는 언제 입대하였나.

함흥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8월 인민군대에 입대했다. 전방(남한과 가까운 거리) 지역에 주둔한 제1군단 13사단이다. 13사단에는 3개의 보병연대가 있었다. 탱크대대에서 2개월간 신병훈련을 받았다.

이후 신병대대 막사건설에 동원되었다. 사단에 없던 부대를 만드는 것인데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것 같다. 1년 뒤 건설을 완성했고 이후 정규 근무에 임할 수 있었다. 주로 순찰, 감시, 잠복근무 등이다.

- DMZ와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서 근무했나.

우리 앞에는 민경부대가 있고 그 뒤에 우리가 있었다. 우리와 DMZ는 가까운 곳은 대략 4km, 먼 곳은 6km 정도이었다. 맑은 날씨면 적군(한국군) GP(감시초소)가 쌍안경 렌즈 속에 선명하게 보였다. 당시 남쪽에서 대북방송을 요란하게 하였는데 나는 의외로 방송보다는 삐라(대북전단)에 더 관심이 끌렸다. 특히, 남조선에 자동차 1.000만대 시대라는 내용에 내 눈을 의심했다. 북한주민 2.000만 명으로 보면 주민 2명당 한 대의 자동차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남조선은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라는 내용에도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웃기는 것은 내 상급병사(강계 출신)가 날 보고 “1만 달러는 뭐고? 달러는 뭐냐?”고 묻는 것이다. 그렇게 북한군인 일부는 달러가 뭔지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외화상점에 가서 달러를 써봤기에 안다.

 

- 군인들 식생활 수준은 어떠했나.

소대에서 소비할 식량과 부식물은 9~10명이 연대로 가서 받아왔다. 쌀, 건빵, 고기, 된장, 미역, 소금 등이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2~3명이 연대에 가서 부식물을 받아왔는데 쌀, 소금, 담배가 전부였다. 이때부터 모든 부식물은 소대가 알아서 자체로 해결하라는 연대 지휘부의 명령이 계속 떨어졌다.

 

- 마음이 흔들린 계기가 있었다면.

솔직히 나는 군대에 나오기 전에 북한사회에 대한 실망감을 미리 느꼈다. 외국에 갔다 온 아버지의 소리를 들을 때나 혹은 평양의 외삼촌 집에 갔을 때나 혼자서 “왜 우리는 외국과 달리 세상을 모르고 사는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최전연 부대에 배치 받고는 더욱 그랬다. 전방 수km 밖에 있는 적진지(남측초소)를 바라보면서 항상 머릿속에는 “저 남조선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정말 헐벗고 굶주리는 나라일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 탈북은 어떤 경로를 이용했는가.

1995년 6월 12일 오전 9시 경, 부소대장이 날보고 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오라고 명령했다. 참고로 전방지대에서는 근무는 물론 어떤 일을 해도 항상 2인 1조 혹은 3인 1조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인원이 부족해서 나 혼자 내보냈다. 입대해서 34개월 만에 처음으로 있은 단독 수행 명령이다. 늘 남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저 곳으로 꼭 가보겠다. 정말 노동당에서 선전하는 대로 남조선이 ‘사람 못 살 썩어빠진 생지옥 사회’라면 다시 되돌아오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그 기회가 군사복무 4년 만에 왔으니 이건 분명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하여 사전에 익혀두었던 노정을 따라 움직였고 오후 3시 경에 DMZ(비무장지대)를 넘었으며 6시 남측 GP에 도착했다.

 

- 그 때의 소감은 어떠했나.

해상 탈북이든 두만강, 압록강 건너 탈북이든 모두가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겠지만 군사분계선 넘어 탈북은 정말 위험하다. 지뢰를 잘 못 건드리면 한 순간에 황천객이 되고 만다. 가장 가까운 거리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구간이 바로 DMZ 통과 탈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옥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천국으로 왔다.

 

- 남한에서 첫 사회생활은.

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1996년 1월 사회로 나왔다. 그해 7월 1일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에 귀순자 특채로 취업하였다. 내가 온 해에 입국한 탈북민은 30~40명 정도였다. 지금 1.000명에 비하면 그야말로 작은 숫자다. 당시 정부에서 기업에 권고하는 귀순자 특채법이 있었지만 강제 사항은 아니었다. 기업에서 “자리가 없어 못 받는다!”고 해도 정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서서히 탈북민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 처음으로 지하철 공사에서 한 일은.

입사하여 맡은 직무는 구로공단역(현 구로디지털단지역) 역무원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표를 파는 일이다. 1999년부터 방배역에서, 2001년부터 잠실역에서 근무하였다. 기억에 남는 건 간혹 무임승차 손님과 마찰이 있는데 주로 취객들이다. 일부 손님과도 시시비비를 다투는데 성질대로 하면 해고 된지 오래전이다(웃음).

 

- 지금은 어떤 직무에 있나.

2003년부터 역무원(역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에서 승무원(열차를 타는 사람)으로 이직을 했다. 8년간 역무원 일을 해보니 지루한 것도 있었다. 차장(열차 뒤 차량에 타는 사람)을 10년 정도 하고 2013년 기관사면허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지하철 2호선 구간을 달리는 열차를 운전하고 있다. 48.8km 거리 구간인 2호선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이다. 연속 두 바퀴 돌고 2~3시간 쉰다. 열차 안전 운행 규정에 그렇게 되어있다.

 

- 열차를 운전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인민군 귀순병 출신인 내가 세계 10대 도시 대한민국 서울의 땅 밑을 달리는 열차를 운전한다고 생각하면 다소 감개무량하다. 내가 운전하는 열차에 하루에도 수십만 명의 서울시민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신다고 보면 영광스럽기도 하다. 고향의 부모님들도 이 아들 모습을 보면 무척 대견해 할 것이다.

 

-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에 대단히 만족한다. 그러나 내가 탈북민이니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먼저 신경이 쓰이게 된다. 남북철도교류 사업이 잘 되어서 여기에 자문이나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기 위해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철도시스템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일부 사람들이 공기업은 모두 편한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공기업에서도 밀리지 않으려면 꾸준히 공부하고 전문 지식을 쌓아야 한다.

 

- 고마운 분이 있다면 누구인가.

서울에 계시는 양부모님이다. 이정익 선생과 조인단 여사 내외분인데 두 분이 나를 양자로 삼아주셨고 지금까지도 친부모 친자식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서울에 살면서 몰랐던 것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셨고 그 답례로 명절이면 고향의 부모님 앞에 찾아가는 심정으로 꼭꼭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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