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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들이 말하는 ‘우리 어머니!’

통일인터뷰.jpeg

 

내 이제는 다 자란 아이들을 거느리고 / 귀밑머리 어느덧 희여졌건만 / 지금도 아이적 목소리로 때없이 찾는 / 어머니 어머니가 내게 있어라. // 기쁠 때도 어머니 괴로울 때도 어머니 / 반기여도 꾸짖어도 달려가 안기며 / 천 백가지 소원을 다 아뢰고 / 잊을 번한 잘못까지 다 말하는 / 이 어머니 없이는 나는 못살아.

지난 1980년대 북한주민들이 즐겨 낭송한 시 ‘어머니’의 한 대목이다. 타향에서 사는 우리 탈북민들에게 더욱 마음에 와 닿는 글이다. 꼭 통일이 되면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기쁘게 만나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사는 탈북민들이다.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신비로운 자본주의국가, 눈에 풍요한 것도 많지만 치열한 경쟁사회인 이 땅에 정착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음지에서 고생하는 후배들을 손잡아 이끌어주는 훌륭한 선배 탈북여성이 있다. 박정순 사단법인 ‘늘푸른상담협회’ 대표이며 얼마 전 서울 양천의 귀 단체 사무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56년 7월 함흥에서 출생, 6남매 중 맏이다. 부친은 당일군이었고 모친은 주부. 나는 76년 3월 함흥공산대학(사로청일군반) 졸업, 함흥OO인민학교 소년단지도원으로 근무했다. 79년 8월 함흥제1교원대학 졸업, 제2경제위원회 산하 XX공장 사로청위원장을 거쳐 함흥OO인민학교 교원(교사)으로 23년간 근무했다.

 

- 교원들에 대한 국가 배려는 없었나.

1980년대 북한사회에는 ‘교원상점’이 있었다. 김일성의 “교원들은 혁명가입니다. 사회적으로 잘 대우해야 합니다”는 교시에 의해 생겼다. 양복지(옷감), 비누, 화장품, 신발 등을 배급표로 공급했다. 질 좋은 상품은 아니었다.

일반 상점이나 식량공급소, 식당 등에서 교원증을 보이면 줄을 서지 않고 우선 공급받거나 이용하였다. 그것만 봐도 사람들은 ‘혁명가’인 교원을 매우 부러워했다. 그렇다고 물건을 더 주고나 좋은 것으로 주지는 않았다.

 

- 1990년대 교원 생활은 어떠했나.

함흥에서는 93년 8월 하순부터 식량배급이 완전 끊겼다. 상점과 식당은 문을 닫았고 공장과 기업소는 가동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마치 귀신에게 홀린 마냥 벙벙했고 위에서는 “사회주의 지키자!”는 노래 합창만 강요했다.

당국에서는 교원들에게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가족생계를 위한 자유시간을 주었다. 주로 술(밀주), 빵, 사탕과자, 의류 등을 개인집에서 사다가 시장에 나가 파는 일이다. 그래야 밥숟가락이라도 겨우 뜰 수 있다.

 

- 좀 더 자세히 말해 달라.

당국은 학교에 학생들에게 수집한 고철을 팔아 식량을 해결하라고 했다. 허나 고철이 있어야 말이지. 일부 공장은 학교들과 손잡고 멈춘 공장기계를 뜯어 팔았다. 대략 1t식량(옥수수, 밀가루, 감자 등)을 구입하면 30%를 학교에 줬다. 거기서 반은 상급기관 뇌물로 바치고 나머지를 교원들에게 돈 받고 팔은 교장이다.

 

- 교원 직업의 특수성이 있다면.

교원에게는 상급학교(예술 및 체육, 외국어학원 등)에 소수 학생을 추천할 권한이 있다. 또한 해마다 개학 때면 교원들은 서로 좋은 학구(생활수준이 좋은 동네 혹은 지역)의 학생들을 담임하려고 무척 노력한다. 학급에 ‘힘센 학부형’(외화벌이기관, 자재상사, 양정사업소, 군부대 등에 종사자) 3명만 있어도 괜찮다.

 

- 일부 학부형에게서 받는 뇌물은.

1980년대는 “당신 자식을 잘 봐 준다”는 명목으로 옷, 자전거, 시계, 화장품 등을 몰래 뇌물로 받았다. 일부 학부형은 교원의 집에 찾아와 ‘돈봉투’도 주었다. 액수는 보통 30~50원 정도, 당시 평교원 월급이 120원이었다.

1990년대는 식량과 부식물, 술·담배 등을 뇌물로 받았다. 학교에는 ‘힘센 학부형’이 전혀 없는 학급도 있다. 그런 반을 맡은 교원은 도시락도 없이 온다. 고난의 행군 때 내가 근무한 학교에서 여성교원(54)이 굶어죽었다.

 

- 본인은 고난의 행군 어떻게 보냈나.

오전에는 학교에 나가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집에 들어와 손님들을 받아 이발과 미용을 해주며 돈을 벌었다. 또한 재봉기술을 배워 군복재질의 천을 구입해 모조군복을 제조하여 시장에 팔았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의류이다.

허망했다. 한때 김일성 수령이 ‘교원혁명가’로 내세워준 학교선생의 명예는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오직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양심이고 도덕이고는 모두 살았을 때나 필요한 성품이 아니겠는가.

 

- 탈북 경위를 말해 달라.

2000년 8월, 고등학교 6학년인 둘째딸을 중국(연길)의 친척집에 심부름을 보냈다. 이후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딸에게서 “중국으로 넘어오라!”는 소식을 받고 2003년 10월, 두만강을 건넜다. 탈북이다. 중국에 오니 딸은 “자기는 한국에 있으니 꼭 한국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 순간 졸도해서 일주일 후 깨어났다.

 

-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둘째딸은 나의 신변안전을 걱정해서 ‘선의 거짓말’을 했다. 그 애는 탈북 후 연길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껴 청도로 이주했다. 거기서 2년간 돈 벌어 한국으로 갔고 나의 탈북비용을 마련했다. 나는 2003년 11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70일 보냈고 2004년 1월 서울로 왔다.

 

- 사회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2005년 1월 국제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여 2008년에 가졸업했다. 이후 2009년 서울기독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9년 3월 서울기독대학교 목회신학과에 입학, 2019년 2월에 졸업했다.

중간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을 밟았고 2014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9월 23일 경기도 포천 삼부기도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다른 공부도 많이 했지만 신학공부가 가장 의미 깊고 보람 있은 것 같다.

 

- 늦은 나이에 공부를 많이 한 이유는 뭔가.

48살에 한국에 왔다. 하나원을 나와 수개월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이후 이마트에서 옷 수선을 몇 달 하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났다. 나 혼자서 돈 벌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정말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북한에 남겨진 2천만 인민보다 확실하게 먼저 온 통일이 분명했다. 가령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탈북민은 지금처럼 계속 생겨날 것이다. 선배인 내가 후배들을 다소 도우려면 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 자격증을 많이 딴 줄 안다.

사회복지사 2급, 청소년복지상담사, 요양보호사 1급, 전화상담사, 평생교육사 2급, 가정폭력상담사, 성폭력상담사, 보육사 2급, 다문화복지상담사 등 모두 60개의 자격증이 있다. 사회복지 문학박사이며 목회자(목사)이다. 정말이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늘푸른상답협회는 어떤 단체인가.

2005년 1월에 설립된 우리 단체는 탈북여성들이 사회정착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를 해소하는데 우선 목적을 두고 있다. 북한에서 배움의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부설 ‘푸른꿈학교’를 통해 학력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귀 단체 부설 ‘가정행복상담센터’는 가정 및 성폭력, 고문피해로 인해 고통을 받는 탈북여성들을 위한 전문상담을 통해 치유를 위한 다양한 치유프로그램과 전문가의 심리검사 및 상담을 통해 국내 정착에 도움을 준다.

 

- 본 단체의 자랑이 있다면.통일부 및 지방자치단체(양천구) 관계자들이 주기적으로 우리 단체를 방문하여 현장점검을 한다. 우리는 그때마다 ‘탈북민전문 상담시설 전국 최고!’ ‘양천지역의 많은 상담전문단체 중 가장 우수!’ 라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지금까지 우리 단체 상담실을 거쳐 간 탈북민은 10.000명에 가깝다.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30%에 해당하는 숫자다. 남북하나재단 산하 전국의 각 지역 하나센터가 생기면서 탈북민상담 건수가 35% 가량 줄어든 상태이다.

 

- 주로 어떤 상담인가.

다양하다. 의료문제, 직업 및 건강문제, 가정폭력문제, 성격 및 학업문제, 자녀양육문제 등이다. 건강문제는 본인의 질병에 맞는 병원을 소개해주고, 직업상담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위주로 찾아준다. 상담은 2~3회가 보통이다.

탈북여성들이 결혼하는 남자는 북한남자, 중국남자, 한국남자 이렇게 세 부류이다. 어디가 좋고 나쁘고 따로 없지만 나라마다 문화가 다소 다르니 특성은 있다. 결혼과 사회생활에서 문화적 극복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 어떤 때 가장 보람을 느끼나.

해마다 스승의 날, 어버이 날이면 우리 상담실을 거쳐 간 탈북민들한데 축하전화나 난을 받는다. 잠시나마 방황하던 자신들의 인생을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준 우리 단체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면서 말이다. 설날과 추석이면 나를 친정엄마로 생각하고 찾아오는 탈북민 부부가 적지 않다. 그럴 때가 제일로 행복하다.

 

- 고마운 분들이 있다면.

송자경 일산든든한교회 목사님이다. 내가 신학공부를 할 때 3년간 모두 수 천 만원의 등록금을 후원해주셨다. 다음 김형태 서울기독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님이다. 석·박사 논문 지도교수님인데 내 인생의 스승과 같다. 훌륭하신 이 두 분이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탈북민들로부터 ‘우리 어머니’로 존경을 받는다.

60여년 곡절 많은 인생을 살았다. 북한에서 남편은 일찍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고향에 남겨진 큰딸 생각이 간절하다. 경제사정이 최악인 힘든 그 사회에서 살자니 오죽 힘들까 말이다. 그럴 때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저 북한 땅을 하루빨리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로 변화시켜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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