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비운의 군인이 더는 없기를”
꼭 50년 전 이맘때(1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대사건이 터졌다.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남한의 심장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것이다. 일명 1·21사태.
북한의 민족보위성(남한의 국방부) 정찰국 소속인 이들은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했다. 허나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신분이 탈로나자 총격전을 벌였다.
그로인해 아침 출근길에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북한군 특수부대원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도주, 나머지 1명은 생포됐다. 그 유일한 생포자가 김신조(당시 26세)이다. 그는 다행히도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만약에 50년 전에 있었던 1·21사태가 북한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엄청난 혼란의 시대가 초래했을 수도 있고 설상가장 대통령 시해를 틈타 북한의 남침이 발발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 땅에 북한과 같은 공산제도가 생겼다면 우리는 지금 가난과 빈궁에 허덕일 것이다.
1·21사태는 분명 대한민국에 안보의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방위력 증강과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것은 확실한 성과다. 2018년 새해를 맞아 50년 전 1·21사태에 대한 회고를 취재하기 위해 경기도 모처에서 김신조 목사를 만났다.
- 고향이 어딘가.
1942년 6월 2일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청진산소공장 기술자로 일했으며 해방 후 공산당원이 되었고 내가 군대에 입대할 시기에는 청암동직주공장 직맹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정미소를 운영하였다. 형제는 7남매인데 내 위에 누이 2명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 1명, 여동생 2명이 있다. 청진중학교를 거쳐 1961년에 흥남기계전문학교(3년제 전문대)를 졸업했다.
- 평범한 노동자의 가정이다.
작은할아버지가 해방 전 만주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서울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해방 후 석방되어 고향으로 왔다. 초대 함경남도 북청군당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덕에 우리 아버지도 쉽게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사촌형 2명이 공군에 입대했다.
- 자세히 소개해준다면.
나는 1961년 가을, 군사동원부 초모사업에 걸렸다. 군대에 입대해서 간 곳이 황해도 평산군 주둔 6사단이다. 여기서 3개월간의 신병훈련을 받고 사단직속 정찰중대(민경: 민간통제지역 특수경찰군인)에 배치 받았다. 20살 때다.
입대해서 2년 뒤, 첫 정찰임무를 받았다. 38선 이남지역에 주둔한 미2사단 주변지형 군사정찰이다. 4명을 데리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이후 평양으로 소환되어 283군부대(정찰국 특수부대)에 소속됐다.
- 두 번째 남파 활동은 언제 무엇인가.
1966년 5월 경기도 양평군에 침투하여 고정간첩에게 공작금과 새로운 비밀지령을 주는 것이었다. 이때는 나를 포함하여 5명이 내려와 여유롭게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했다. 개성초대소에서 며칠을 푹 쉬고 평양으로 올라가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우리의 대호는 ‘101’이었는데 어디든 무사통과였고 최우선이었다.
- 1·21사태에 대해 말해 달라.
1967년 초, 정찰국장 김정태(김일성의 빨치산 전우 김책의 아들)가 김일성의 재가를 받아 각 군단에서 선출되어 온 1만 명 규모의 병력으로 특수부대(124군부대)를 창설했다. 부대에는 모두 8개 기지. 1개 기지에 1200명 정도 있다.
나는 그해 8월에 6기지(황해북도 연산군)에 소속되었다. 훈련은 지금 생각해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대단했다. 실탄장전 완전무장에 20kg 배낭을 메고 40km 거리를 3시간에 주파한다. 일반인의 걸음보다 3배나 빠르다고 보면 된다.
- 명령 발포자가 누군가.
정찰국장 김정태이다. 1968년 1월 13일, 우리 31명을 불러 놓고 “서울에 가서 박정희의 목을 따오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김종운이 총조장이다. 박정희의 목을 따야하는 장본인이다. 한 개조에는 6~8명이다. 나는 2조 조장으로 청와대 1층을 장악하는 임무를 받았다. 3조는 경호실 습격을 맡았고 4조는 엄호조이다.
-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하여 18일 휴전선을 넘었다. 19일 꽁꽁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횡단, 경기도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형제와 마주쳤다.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로워 거수의결을 통해 그들을 살려주기로 하고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었겠다.
그렇다. 나무꾼 형제는 곧바로 파출소에 사실을 신고했다.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발포되고 서울 자하문초소에 당도하여 우리의 정체가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어졌고 나는 일부로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피신을 했다. 살고 싶었다. 김일성의 임무를 수행하면 죽어도 영광이지만 수행하지 못하면 개죽음이다. 그게 싫었다.
- 당시 체포가 아닌 투항과 자수였다는데.
그렇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한다. 나는 분명 투항했고 자수했다. 허나 모든 언론에서는 ‘체포’로 명명했다. 이유가 있다. 당시 언론은 국가가 통제하던 시절이었고 국민들에게 “북한군 특수부대원 투항!” 이라고 하면 군과 경찰의 사기가 떨어진다. 또 국민의 사기는 어떻고? 불안을 느낀 국민들이 외국으로 이민가고, 외국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 나라의 경제는 순식간에 주저앉기 때문이다.
- 사회생활을 언제부터 하였나.
자수(귀순) 2년 뒤, 정부에서 소개 받은 첫 회사가 한국화약(지금의 한화그룹)이었다. 내가 공학을 전공했기에 그 곳으로 보내준 것 같다. 허나 황당한 점이 있었다. 만약 회사에서 안전부주의로 폭발사고라도 나면 북한에서 내려온 귀순자인 나와 연관될 듯싶다는 생각에 해당기관에 “싫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여 다음으로 소개받은 회사가 삼부토건이다. 당시 남한최고의 건설 회사였다. 여기서 9년간 근무했다. 1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일부에서 흥청망청 문화가 사회주의사회 못지않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 아내를 어떻게 만났는가.
나보다 3살 아래인 아내(최정화)는 전라도 태생의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녀가 대학졸업 후 취업준비시절(28살)에 언론사로 수소문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왔다. 그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며 나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많이 감동했다.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에 내 마음을 열어 197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 목회자가 된 것은 아내의 영향이겠다.
물론이다. 아내의 성실한 종교생활에 내 마음과 발걸음이 끌렸다. 결국 나를 교회로 전도한 사람이 아내다. 1991년 서울침례회신학교(현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서울성락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활동을 하였고 지난 2012년 은퇴하였다. 지금까지 모두 3000회 안보강연을 가졌다.
- 남한에서 가장 고마운 분은.
거두절미하고 아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고마운 여인이 세상에 없었다면 지금의 김신조도 없었을 것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바른 가정교육과 통일애국심으로 가득한 아들딸 모두 출가하여 나에게 손자 4명, 손녀 1명을 안겨줬다.
-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어떻게 보나.
50년 전 나에게 “서울에 가서 박정희의 목을 따오라!”고 명령한 김일성이다. 그의 손자 김정은이 지금 평양에서 자기 할아버지의 본심을 그대로 이었다. 단언컨대 방법에서만 조금 다를 뿐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북한정권의 야심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 다시는 나 같은 비운의 군인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
- 끝으로 할 말이 있다면.
남한이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인 50년 전에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 안보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국민들 모두가 배가 불러서 안보신경을 안 쓴다. 김정은 정권이 아무리 핵개발, 미사일발사를 해도 마트에서 비상용품 구매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한심한 것은 매달 진행하는 민방위훈련도 너무 형식적이다. 사람의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고 안보도 가장 평화로울 때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