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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수령인 김일성(당시 68세, 총비서)의 후계자가 된 김정일(당시 38세, 조직비서)이 국가를 완벽히 통치하면서부터 북한은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빠르게 변해갔다. 전체 인민을 대상으로 김일성 우상화 학습과 강연, 생활(사상)총화 등이 더 한층 강화되었고 영화, 도서, 미술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수령 충성경쟁이 치열해졌다. 평양시내 수령우상화 건축물도 이 시기에 우후죽순 마냥 솟아났다. 이때부터 노동당의 지시로 ‘사회주의 생활문화 확립’ 명분아래 모든 주민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까지 철저히 규제되었다. 사람들은 청바지를 입거나 머리를 기르고 염색하면 안 되었고 여성들은 출퇴근 시간에 꼭 치마를 입어야 했다.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가 열리는 2021년 1월도 북한의 ‘사회주의 생활문화’는 진행 중이다. 탈북민들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낡은 북한생활이다. 얼마 전 천안 아산에 위치한 전문미용실 <미즈샵>을 운영하는 이수진 원장을 만났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83년 2월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으며 여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온성상화탄광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산림선전대 선동원이었다. 같은 상화탄광 노동자인 할아버지는 남조선 부산 태생의 국군 군인으로 6·25전쟁기간 인민군에 포로가 되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 가족은 정치적 그늘 속에 살아야 하는 가련한 존재이다. 노동당에 입당은 둘째 치고 항상 힘들고 어려운 노동에만 차출되는 가련한 신세였다.
- 부자(夫子)가 탄광 노동자였나.
1958년생인 아버지는 9년간 군사복무를 하고도 할아버지가 ‘국군포로’이어서 입당을 못하고 제대해 고향으로 왔다. 할아버지가 탄부이니 아버지도 탄부가 된 것이다. 탄광이나 마을에서 언제나 안 좋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국군포로가족’인 우리 집부터 의심하는 풍조가 동네 사람들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우리 옆집 가장은 ‘의용군’(6·25전쟁기간 인민군대에 입대한 남한사람) 출신으로 똑같은 남한출신 사람이었다. 그가 손버릇이 나빠서 크고 작은 도둑질을 밥 먹듯 했다. 탄광영양제식당에서 돼지고기를 움쳐다가 자기네가 먹기 전에 우리를 우선 주었다. 결국 고깃국 냄새를 먼저 풍겼으니 우리 집은 도둑으로 지목되었다. 여름철 마을주민들의 텃밭에서 감자, 옥수수, 배추 등이 도둑 맞혀도 은근히 우리 집을 의심했다. 똑같은 남쪽 출신이어도 ‘의용군’보다 6·25전쟁기간 총을 들고 인민군과 싸웠던 ‘국군포로’ 출신을 더욱 의심하고 추궁하였다.
- 할아버지의 평소 모습은 어떠했나.
항상 말을 조심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아버지와 우리 두 손녀에게 “너희들은 밖에 나가서 언제나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내게 조용히 말해주기를 “남조선 출신 동료 3명이 술자리에서 ‘수령님(김일성) 대에도 통일이 안 되었는데 장군님(김정일) 대에는 통일이 되겠는가?’고 수근 거렸는데 다음날 2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토록 말이 무서운 북한사회이다.
- 유년시절 추억 중 특별한 것은.
인민학교 3학년 때 시절이다. 학급에서 공부도 나름 잘 했고 또 학교당국이 바치라는 과제물(약초, 토끼가죽, 구리 등) 수행도 모범이었다. 학생간부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얘 수진아! 간부고 뭐고 싹 그만 둬라! 담임선생님이 말하기를 너는 국군포로 손녀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사회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1998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대학, 전문대)는 꿈도 못 꾸고 온성상화탄광 제복공장에 배치를 받아 재봉공, 채탄기·콘베아 운전공으로 일했다. 할아버지가 탄광노동자이니 아버지, 나까지 모두 3대가 탄광노동자였다. 놀랄 일도 아니다. 할아버지(김일성)가 수령이니 손자인 김정은이 자동적으로 수령이 되는 나라가 북한이니 말이다. 북한에서는 조상이 간부이면 자손도 간부가 되고, 조상이 농민이면 자손도 대대로 농민으로 살아야 한다.
- 탈북 경위를 말해 달라.
할아버지가 국군포로이니 언제나 주변에는 탈북브로커가 배회하였다. 짐작컨대 가령 탈북을 희망하는 국군포로를 혹시라도 만나면 크게 돈을 버는 것 같았다. 2001년 여름 경, 할아버지가 브로커에게서 받은 남한친인척 정보를 아버지에게 몰래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받고 중국으로 넘어가 확인하고 다시 돌아왔다.
- 보위부에 발각 되지 않았는가.
안 될 수가 있는가. 아버지는 그 일로 3년간의 노동교화소(하루 14시간의 강제노역장) 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였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는 모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탈북을 하여 한 달 만에 남한으로 입국하였다. 국군포로였기에 영사관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빨리 실행되었다. 2004년 경, 서울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고 돈도 보냈다고 했는데 브로커가 도중에서 가로채서 우리는 한 푼도 못 받았다.
- 탈북자 가족으로 무사했나.
할아버지가 서울에 가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우리는 이제 모두 죽었구나!’ 했는데 반전이 생겼다. 보위원이 나타나 “할아버지가 탈북을 했어도 당에서는 가족을 용서한다. 그러니 걱정 말고 평소대로 당에 충성하면 된다”고 하였다. 훗날 보위원이 말하기를 “국제사회에서 북조선 인권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기에 탈북가족을 처벌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국군포로 가족만 예외적으로 봐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이후 숨을 죽이고 살았다.
- 탈북계기와 남한입국은.
2005년 11월, 23살인 내가 약혼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브로커를 통해 서울의 할아버지에게 “빚 갚는 심정으로 장손녀 결혼식 비용이나 보내 달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였다. 할아버지가 그때 “가족 모두 탈북하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동안 옥신각신 싸웠다. 어머니는 “탈북하다 잡히면 다 죽는다”며 반대했고, 아버지는 “지옥의 이 땅에 더 미련이 없으니 죽더라도 가자”고 했다. 2006년 2월 우리 가족 4식구가 목숨 걸고 탈북길에 올랐다. 중국의 훈춘, 연길, 심양 등에서 각각 2개월씩 모두 6개월간을 보냈다. 한국영사관 관계자의 도움을 받으며 서울로 가는 준비를 하였으며 심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2006년 7월 할아버지의 고향이 있는 대한민국에 안기게 되었다. 그해 11월 하나원(통일부 산하 탈북민정착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 처음 어디서 무슨 일을 하였나.
‘국군포로가족’인 우리 4식구는 서울로 주거지를 배정 받았고 나는 경상북도 상주로 갔다. 그 곳에 나보다 먼저 탈북하여 온 고향 선배가 있었는데 그의 주선으로 미용실 보조 일을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지만 다소 재밌었다. 그 곳은 디자이너가 11명, 스태프가 13명이나 되는 제법 큰 미용실이었다. 2개월 뒤 OO미용전문학원에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 일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외래어였다. 미용실에서 직원들이 쓰는 용어 중에는 헤어(머리카락), 컷(자르다), 롤(구르프), 샴푸(비누), 매직(직발), 타올(수건) 등 영어가 많다. 북한에서 듣지도 못한 소리였으니 솔직히 말해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당황하였다. 그럴 때마다 고향선배에게 조용히 물어보면서 배웠다. 나는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도 삼각대에 가발을 씌우고 부지런히 연습을 했다. 그 결과 6개월 뒤, 염색과 커트도 디자이너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 다른 일도 해보았는가.
3년 뒤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따라 아산으로 이사했다.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OO건설회사 현장사무실 경리직원으로 1년간 근무하였고 OO회사에서 9시부터 15시까지 시간제 근무로 2년간 일을 하였다. 이후 OO생명주식회사 보험매니저로 한동안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 <미즈샵>은 언제 개업했나.
지난 2015년 6월에 오픈했다.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22평이다. 좌석은 3개, 한 쪽에는 손님 대기석이 있는데 그야말로 ‘동네사랑방’ 같은 아늑한 공간이다. 벌써 이곳에서만 7년째 영업 중이니 제법 단골 고객이 있다. 미용은 내가 남한에서 처음 배운 기술이자 마지막까지 함께 할 직업이다. 나에게 고객은 잠깐 만나는 손님·나그네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할 이웃이다. 가급적이면 그들과 한 식구처럼 화목한 모습으로 지내려는 내 마음이다.
- 일하면서 기쁠 때는 언제인가.
지금은 정부의 코로나19 방역규칙에 따라 근무시간에 가급적 대화를 자제하며 일을 한다. 안 그러면 손님과 열심히 수다를 떨며 일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사를 들으며 마냥 즐겁게 일하는 순간이 제일 기쁘다. 미용은 곧 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손님이 만족한 표정을 짓고 가게를 나서는 순간도 행복하다. 고객의 밝고 감사한 표정만큼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값진 것이 아닐까.
- 또 다른 묘미가 있다면.
나는 가게를 찾는 고객들에게 내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 할아버지의 손녀라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손님 중에는 “북한주민들이 정말 어렵게 사는가?”고 묻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23년간 살았던 인간 이하의 삶의 한 부분을 생동하게 말해준다. 그런 가슴 아픈 소리들 듣는 고객들은 대한민국 국민임을 감사히 생각할 것이니 결국은 내가 안보강사를 겸하는 것이다(웃음).
-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
작년 7월 하늘나라에 가신 할아버지에게 우선 감사하다.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이 북한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를 받고 살았어도 나중에는 그 할아버지 덕에 이렇게 좋은 나라 대한민국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도 고맙고 두 자녀가 있는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남편에게도 고맙다.
- 앞으로 계획과 하고 싶은 말은.
지난 10여 년간 전문미용사로 일하면서 쌓은 경험과 기술을 후배 탈북민들에게 전수하고 나누고 싶다. 굳이 실습장을 갖춘 큰 미용실이 아니라도 요즘 유튜브방송 시대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며 그 방법을 모색 중에 있다. 무슨 일에서든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앞서거나 조급하면 성공할 수 없다. 꼭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다. 벌은 만큼 베풀고 나눌 줄도 아는 것이 아름다운 미덕이고 봉사이다. 그것이 참다운 삶의 유산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