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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의 기쁨과 보람을 알기까지

통일인터뷰.jpeg

 

작년 10월 조성길 전 이태리 주재 북한대사대리의 비공개 남한입국 보도에 이어 최근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대리의 서울인터뷰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두고 탈북민사회에서 나름대로 엇갈린 평가와 반응이 분부하다.

“북한서 금수저는 남한에 와서도 대우를 받으니 허망하다” “북한의 간부들이 많이 탈북해야 김정은 정권이 무너진다” “보통 사람이 희망을 갖기는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다” “간부가 득세하고 최고이기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다”

지난 2012년 조명철 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교수)이 탈북1호 국회의원으로 간택, 2020년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탈북민 90%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평민 출신들인데 비하면 다소 허탈한 생각도 든다.

본격적인 탈북민 시대는 연평균 1,000명 씩 입국하던 2000년부터이다. 남한사회 여러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멋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최근 경기도 부천시 모처에서 탈북민봉사단체인 ‘한마음회’ 최복화 회장을 만났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77년 4월 함북 무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2남 2녀 중 장녀였다. 부친은 림업기계공장 초급당비서, 모친은 OO상점 판매원이었다. 학교생활 때 사상담당위원, 소년단부위원장, 사로청사상담당부위원장 등 학생간부로 활동했다. 학창시절 꿈은 작가였고 1지망은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2지망은 평양의학대학이었다.

공교롭게도 1992년 11월부터 진단불명의 질병으로 아프기 시작했고 급기야 페결핵, 복막염, 림파염 등 합병증이 와서 1년 6개월간 병원생활을 하고 완치되었다. 1994년 청진교원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았으나 열악한 대학기숙사 환경과 나의 건강을 염려한 모친의 반대로 입학을 포기하고 무산OO농장에 취직했다.

 

- 부친은 어떤 분이시었나.

1960년대에 완벽한 훈련을 받고 문건탈취 목적으로 한국에 무려 세 차례나 침투하여 작전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한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1984년 당중앙의 부름을 받들고 자원 진출하여 농촌으로 나가서 부문당비서 겸 분조장을 하였다.

이후 벌목공으로 선발되어 소련(러시아)에 가서 벌목중대장(직장장)으로 일했다. 1986년부터 5년간 벌목을 마치고 귀국한 부친은 소련에서 당한 노동재해로 정신신경 질병이 생겼다. 그것을 치료하느라 소련에서 벌어왔던 TV, 삼면경대, 녹음기 등을 팔았으나 부친은 1996년에 사망하셨고 모친은 1999년 질병으로 돌아가셨다.

 

-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일명 ‘대홍단달리기’ 장사를 했다. 사카린(뉴스가), 식소다, 상과자(결혼식상에 올리는 빵·과자), 신발, 장갑 등을 대홍단으로 가지고 가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녹말가루, 밀, 보리 등과 바꾼다. 그것을 다시 무산장마당(시장)에서 팔면 대략 원가의 3배 이익금이 발생하는 짭짤한 일이다.

 

- 또 어떤 장사를 하였나.

밀수를 했다. 북한에서 토종개 한 마리를 1,500원에 사갖고 중국으로 가서 17인치 흑백TV, 재봉기, 녹음기 중 한 개와 바꾸어온다. 그걸 연사군에 가서 팔면 6,000~7,000원을 받는다. 뒤를 봐주는 국경경비대 군인에게 뒷돈을 주고도 3,000~5,000원이 남는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돈이면 무엇이든 다 통하는 시국이었다.

당국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밀수(품목은 사람마다 다양함)는 국경을 넘나드는 위험한 장사인 것만큼 수익금도 아주 쏠쏠했다. 그 덕에 한동안 주변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과는 달리 배고픈 근심, 추운 걱정을 모르고 살았다.

 

- 발각되어 처벌 받았던 적은 없나.

2002년 5월 30일 밀수로 중국에 다녀오던 중 잠복 중인 안전원들에게 현행 체포되었다. 안전부 조사를 받을 때 “먹고 살기 위해서 도강했으며 불법인 줄 정말 몰랐다!”고 실토했으나 회유, 협박 등에 못 이겨 1년 6개월간 모두 40~50회 도강을 했다고 고백했다. 결과 결혼해서 낳은 돌(1살)을 한 달 앞둔 딸과 생이별을 하고 3년 교화형을 선고 받았으며 무산구류장을 거쳐 함흥교도소에 수감되었다.

 

- 교도소 내부 생활은 어떠한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잠자리 정돈을 하고 이어 줄지어 강가에 나가 건설공사에 쓰일 돌을 수집하는 조기작업(식사 전에 하는 작업)을 한다. 식사는 애기주먹 크기의 옥수수밥덩어리 1개와 멀건 시래기 소금국이 전부였다. 건설반, 축산반, 농산반, 화목반 등이 있는데 나는 농촌에서 왔다고 화목반에서 일하게 되었다.

축산반, 농산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너무 배가 고파 농작물이나 짐승사료도 훔쳐 먹기도 한다. 건설반에는 주로 안전원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걸핏하면 과격한 성격을 살리는 수감자들을 보낸다.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어느 날, 함흥교도소에서 탈영자 2명이 발생하였다. 온종일 사이렌이 울렸고 다음날 2명을 체포했다. 주모자는 대중 앞에서 총살, 공모자는 수감자들의 돌팔매질을 맞아 만신창이 되었고 5년 증형(본래 형기에 더 받음)을 받았다. 교도소생활을 하며 너무 힘들고 무서워 “다시는 두만강 물에 발을 담그지도 않을 뿐더러 중국 쪽을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도 가끔씩 악몽을 꾼다.

 

- 처벌 탈북여성은 여러 부류가 있나.

중국서 결혼했던 여성은 ‘도강재’, 나처럼 장사(밀수)하던 사람은 ‘밀수재’라 부른다. 남한에 가려다 체포된 사람은 ‘남조선기도’라고 한다. ‘도강재’ ‘밀수재’에게는 각각 형기가 있지만 ‘남조선기도’는 형기 자체가 없다.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데 아마도 ‘OO관리소’(정치범수용소)로 이송시키는 것 같았다.

 

- 교도소에서 언제 출소했나.

2003년 8월 조국해방전쟁승리 50돌을 맞아 대사령(특별사면)을 받고 나왔다. 집으로 와보니 세 살밖에 안된 딸은 이 엄마를 기다리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죽었으며 시집에 있던 오빠와 남동생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마치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는 가족식구 행불 광경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지만 설마 나한테도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던 터라 망연자실했다.

 

- 언제 탈북하였는가.

당국이 식량을 배급하지 않으니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했던 밀수였다. 한 살도 안 된 딸애와 생이별을 당하고 27살의 나이에 상상도 못했던 교도소생활을 하였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피를 물고 살아서 돌아 왔건만 나를 기다린 것은 딸의 죽음과 생사조차 알길 없는 오빠와 동생의 소식이었다. 절망과 암흑 그 자체였다.

나에게서 남은 것은 북한사회에 대한 원망과 저주뿐이었다. 한시도 살고 싶지 않았고 2003년 9월 두만강을 건너면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탈북을 했다.

 

- 중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결혼을 해서 딸을 낳고 흑룡강에서 살고 있을 때 전화번호 하나로 나를 찾아 온 오빠랑 상해에 가서 6년간 한국식당 식모로 시작해서 주방장으로 근무하였다. 상해에서 한국에 보내주겠다는 고마운 분들도 만났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한국행을 시도하다가 체포되면 가족과 친척의 목숨이 위험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구류장에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2010년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온 남동생을 찾게 되었다. 꿈같은 일이었고 근 1년의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했다. 2011년 11월 오빠와 함께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 남한 생활 초기는 어떻게 보냈나.

하루에 보통 2~3시간씩 자면서 낮에는 컴퓨터학원과 요리학원을 다녔고 밤 9시부터 익일 9시까지 식당에서 야간근무를 하였다. 이후 국수나무 음식점 주방에서 요리사로 일했으며 이후 꿈에도 그리던 나의 가게(함경도엄마손맛집)를 2017년 9월 오픈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으나 건강악화와 개인사정으로 6개월 만에 식당을 폐업했다. 사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 ‘한마음회’를 소개해 달라.

2017년 12월, 경기도 부천지역에 거주한 탈북민들의 정착도움 및 봉사활동을 적극 장려하여 지역사회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인식개선을 증대함으로써 먼저 온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범한 탈북민 봉사단체이다.

부천지역에서 가장 크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2019년부터 2년간 본 단체 총무를 역임했고 올해 1월부터 3대 회장에 취임했다. 현재 회원은 100여 명이며 부천지역에는 탈북민이 대략 700명 정도 있는 걸로 안다.

 

-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는가.

창립된 해부터 2019년까지 매월 정기적으로 부천 관내 사회복지관들과 협업하여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무료급식을 진행했고 정기적으로 북한음식체험, 환경정화 등 여러 봉사활동을 활발히 진행해왔다.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과 사단법인 나눔세상휴먼플러스, 경기서부하나센터와 협력하여 착한봉사단3기로도 활동하였다.

작년 11월 21일 신중동종합사회복지관에서 “2020년 김장김치 나눔 행사”를 개최했다. 자원봉사자들과 우리 단체 회원들이 만든 김치 200박스는 지역 취약계층인 소년소녀가정, 장애인가정, 한부모가정, 독거노인가정 등에 전달되었다.

올해 2월 4일 고강사회복지관에서 “2021년 설맞이 사랑의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탈북민들과 지역사회 장애인, 저소득층가정 등에 전달된 선물박스 100개 안에는 주방용품, 섬유유연제, 화장지, 키친타올, 양말 등 생필품이 담겼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세계적인 전염병 코로나19로 작년에 무산되었던 사업들을 언택트 방식으로 전환하여 진행하고 탈북민가정 등을 단체에 소속시켜 지속적이면서 꾸준한 관심을 갖도록 하겠다. 후원자분들을 계속 찾아 도움요청을 드리고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던 어르신 무료급식을 도시락으로 변경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당면하게 새 사무실 구입에도 애로를 느끼는데 후원자들의 따뜻한 손길도 적극 기다린다.

 

- 봉사를 뭐라고 생각하나.

하나원에서 퇴소할 때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벌어서 꼭 부자가 되어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부자가 되기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지금의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를 찾았다.

봉사보다 멋지고 보람된 일은 없다. 봉사를 하면서 남에게 주는 기쁨보다 내가 느끼는 행복이 더 큼을 알았다. 봉사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 손을 잡고 작은 희망과 위로를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남한에는 정부 및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민간기업, 사회단체, 개인 등 지옥의 땅 북한에서 고생 많았던 우리 탈북민들을 기꺼이 도와주려는 고마운 손길이 많다. 우리 3만 탈북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지역사회의 남한 분들과 더 가까이 허물없이 어울려서 소통하며 통일의 마중물로써의 역할을 다해가야 할 것이다.

수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끝끝내 살아서 대한민국에 입국한 3만여 탈북민들이 잘 정착해서 통일의 그날 금의환향 하는 그 순간을 그려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 탈북민들의 남한 성공정착은 통일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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