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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에서 백두까지 내 조국입니다"

해녀 통일인터뷰.jpeg

림일 작가가 제주 서귀포 해변에서 탈북1호 해녀 성서연씨와 인터뷰를 갖고 기념쵤영을 가졌다.

 

냉전(미국과 소련의 대결구도) 종식이후 1991년 4월, 제주도에서 있은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현 러시아) 대통령 간의 한-소 정상회담은 ‘평화의 섬’ 제주를 동북아중심의 외교무대로 국제사회에 확실히 부각시켰다. 이후 제주도서 한·미, 한·일, 한·중 정상회담 등 양자 및 다자간 정상회의가 수차례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한 해 평균 수백 만 명으로 명실공이 한국 최고의 관광지이다. 이국적 풍경이 다소 이채롭다.

이런 환희로운 사실을 탈북민들은 남한에 와서 알게 되었다. 노동당에서 철두철미 외부의 현실을 감추기 때문이다. 무지몽매한 인민이 북한에서 아는 제주도 정보는 고작 “조선반도 남해바다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섬” 정도가 전부이다. 3만 탈북민사회 80%가 여성이며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남한에서 본인의 적성과 취미에 맞는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모처에서 탈북여성 중 유일하게 멋진 해녀로 일하는 성서연 씨를 만났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81년 8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2녀 1남 중 맏이였고 부친은 함흥동약관리소 지배인, 모친은 시(市)여맹위원회 간부였다. 부친은 항상 “서연아! 너는 형제 중 맏이니 꼭 대학공부를 해서 멋진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공부보다는 예능 쪽에 관심이 더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전교학생 중 세 번째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놀새(공부는 하기 싫고 약자를 괴롭히는 등 사회 불량행위를 좋아하는 학생)였으니 늘 부모님과의 마찰이 심했다.

 

- 고교졸업 후 경력을 말해 달라.

고등학교 졸업해인 1998년 초, 동창생 A씨는 친척의 노력으로 조선인민군4·25체육학원에 갔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조선인민군4·25예술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A씨가 퇴학하고 와서 중국과 밀수를 하였다. 그가 어느 날 “서연아! 중국에서 한 달간 식당 설거지를 하면 300위안을 받는대. 우리 중국에 가서 두 달만 일하고 올까? 그 돈이면 함흥에서 집을 하나 사고도 남아!”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탈북을 하였는가.

A씨와 함께 1998년 3월, 함경북도 무산을 지나 탈북해 중국으로 갔다. 17살의 나이인 우리는 대기 중인 인신매매범에 걸려 하북성 탕센 지역에 인력(人力)으로 팔렸다. 만약 우리가 20살 이상이었으면 인신매매범들은 우리를 강제결혼 대상으로 처분했을 것이다. 이곳은 농촌지역으로 대추, 땅콩, 밀 등이 주요 농작물이다.

이 곳에 아이, 어른, 남·여 등 몇 가족을 포함해 40명의 탈북자가 있었다. 업주는 우리를 돈 주고 사왔기에 노예처럼 부렸다. 밥은 배 불리 먹여주었지만 돈은 주지 않았다. 탈출을 시도했으나 본보기로 공안에 신고 돼 북송되었다.

 

-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2002년 9월 온성보위부서 7일간, 청진집결소서 10일간의 도강(탈북) 조사를 받고 최종적으로 2년 징역형을 받았으며 OO노동교화소(감옥)로 가야했다. 다행히 아버지 지인의 도움으로 2개월간 노동단련대 입소 결정으로 무마되었다. 도로를 개설하는 혹독한 강제노동에 차출되어 오전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고된 노동을 하였다.

 

-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던가?

나는 단순히 돈을 벌려고 탈북을 했고, 중국에서 노예노동을 하면서도 주권(공민권)이 없으니 싫었다. 사실 중국에서 개가 쌀밥을 먹는 걸 보고 놀랐다. 북송이지만 그래도 조국이라고 다시 왔는데 이건 뭔가? 죄인 취급을 하니 말이다.

노동단련대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오니 아버지는 “야! 너는 어디든 어서 시집을 가라. 우리 가문에 더 이상 짐이 되지 말고!” 하였다. 아버지 가문에는 영웅이 2명이나 있을 정도로 성분이 너무 좋았다. 그러니 더욱 오기가 생겼다. 내 기필코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 우리 가족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 언제 다시 탈북을 하였나.

2003년 2월, 단신으로 탈북을 했다. 노정은 1차 탈북 때와 같았고 목단강 시골로 들어갔다. 옥수수 알까기, 김매기 등 농사일을 하였고 수분하, 동녕 등 지역을 다니며 건설노동은 기본이고 돈이 될 만한 일은 가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지인의 도움으로 호구(신분증)를 만들었고 이후 위해에 가서 여행사 도우미로 취업했다.

 

- 한국에는 언제 왔는가.

중국여행사 도우미를 하면서 비로써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내가 북한 고등학교에서 당국이 강제주입해준 교육대로 ‘썩어빠진 미제의 식민지 남조선’ 이란 곳이 중국인들도 부러워하는 한국임을 알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내가 탈북하면 고향의 가족에게는 죄가 된다. 그래도 사람답게 살고픈 결심이 강경했다. 중국호구를 갖고 여행사에 근무했으니 한국에 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2007년 7월 여행비자로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와 국정원에 자수하였다.

- 사회생활 초기는 어떻게 보냈나.

하나원에서 나는 관계자에게 “조선소에서 돈을 많이 벌수 있다니 나를 통영으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받은 주거지가 경상남도 통영시, 취업한 곳은 OO조선소였다. 맡은 일은 제작 중인 대형선박(배) 안의 선장실과 기관실에 있는 수많은 전기 및 통신선을 결선(설치 및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근무 파트에는 6개 조에 남자가 80명이고 여자는 나 혼자였다. 입사 2개월 만에 반장으로 승진했다.

 

- 또 다른 일은 무엇을 하였는가.

OO조선소에서 2년간 열심히 일하며 다람쥐쳇바퀴 마냥 출근, 일, 퇴근하는 생활에 다소 실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내가 자유의 땅에 와서 어딘가 구속되어 살아야 하는가?”는 자괴감이 들어 명예퇴직을 했고 사업(해산물포장마차)을 하였다. 돈은 크게 벌지 못해도 마음은 일단 편했다. 이때부터 사업의 묘미를 솔솔 느꼈다.

이후 결혼을 했고 육아를 했다.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나였으며 2015년 경남 거제시에 처음으로 해녀학교가 생겼다. 여기에 눈이 꽂혔고 일단 한 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는 내 성미니 학교를 다녔다.

 

- 좀 더 자세히 소개해준다면.

해녀학교는 교육기간이 4개월짜리인데 주 2일간, 하루 8시간 이론 및 실기실습을 한다. 든든하고 건강한 체력은 기본이다. 1기로 졸업을 했는데 30명의 졸업생 중 나는 첫 번째로 김해의 모 선주에게 스카우트 되었다. 탈북여성이니 정신력과 생활력이 남보다 강할 것이라는 호기심이 선주에게는 다소 유익했던 것이다.

 

- 제주도에는 언제 왔는가.

거제에서 1년간 해녀생활을 하고 이왕이면 내 적성에 맞는 해녀생활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제주도로 가고픈 생각이 굴뚝같았고 다행히 좋은 직장(OO조선소)에 다니던 남편이 내 뜻을 쉽게 받아주었다.

2017년 4월, 남편과 함께 두 딸을 데리고 여기 제주도로 이사를 왔다. 이후 제주해녀학교(4개월)를 졸업했으며 ‘잠수회원증’을 받고 해녀가 되었다. 참고로 제주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 해녀는 어떤 사람인가.

해녀는 산소호흡기 없이 바다에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전문여성 어업인(漁業人)이다. 세계에서 해녀가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현재 한국에는 부산, 통영, 울릉도, 태안, 삼척 등 지역에 해녀들이 수백 명 있지만 제주에는 수천 명이 있다. 해녀사회에서 제주해녀를 ‘어머니해녀’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선주(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해녀가 있고, 개인(사업)적으로 일하는 해녀가 있다.

 

- 바다와 해녀 세계가 궁금하다.

해녀들은 바다를 세 종류로 구분한다. 섬에서 가까운 곳은 ‘짧은바다’, 바닷가에서 다소 떨어진 곳은 ‘나간바다’, 거리가 아득히 먼 곳은 ‘긴바다’ 라고 부른다. 해녀들의 사용도구는 물옷, 물안경, 빗창, 까꾸리, 테왁망사리 등이 있다.

해녀도 세 부류다. 얕은 바닷가에서 파래를 따는 해녀는 하근, 수심 10m에서 물질(바다 속에서 해산물 따는 일)하는 해녀는 중근, 그 이상 깊이서 물질하는 해녀를 상근이라고 한다. 상근은 일명 고수해녀로 보통 한 번 잠수해서 2분 이상 작업을 한다. 상근이 되려면 최소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져야 한다. 나는 하근이다.

 

- 해녀의 일과는 어떻게 되는가.

날씨에 따라 다르며 한 달에 보통 12일 정도 바다에 들어간다. 시간도 물때(밀물과 썰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에 따라 다르며 평균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까지이다. 수심 5~20m 깊이서 물질을 진행하며 소라, 해삼, 전복, 성게, 미역 등을 채취한다. 수협이나 개인 식당들에서 경매로 가져가며 수입은 해녀 부류에 따라 다르다.

 

- 제주도의 생활 특성은 뭔가.

한국에 입국하여 경남 지방에서 10년 살았고 현재 제주도에서 5년째 살고 있다. 육지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처절하게 치열했다고 할까. 아침에 눈뜨면 출근(사업), 업무집중, 퇴근 등이 반복되어 마치도 돈에 쫒기 듯 하는 삶이었다.

섬(제주도) 생활은 다소 다르다. 제주도는 국내관광 1위로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다. 많은 주민들이 관광관련 산업에 종사하다보니 여유로운 생활의 모습을 보인다. 한국에서 15년 살아보니 돈과 여유생활 습성은 정말 별개라고 본다.

 

-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

바다서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7살, 5살 난 두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올 때이다. 나의 보물단지인 요것들을 보면 하루 피곤이 말끔히 풀린다. 물론 드살(자존심과 자기주장이 매우 강한 사람을 지칭하는 함경도 사투리)이 센 이 ‘함흥여인’을 따라 새로운 정착지에서 열심히 정착 중인 토종남한출신 남편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항상 나에게 사랑과 용기를 주는 그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 어렵게 인터뷰를 하였다.

많이 고민을 했다(웃음). 가장 큰 이유는 어린 두 딸에게 엄마의 가슴 아픈 고향이야기를 벌써 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면 꼭 해줘야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한편으로 보잘 것 없는 나의 사례가 한국에 정착하는 후배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결국 이렇게 수락하게 되었다.

탈북민도 이북고향의 실향민이다. 800만 이북도민의 주간종합지『오도민신문』에 연재되는 <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가 진정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을 보며 멋지고 훌륭한 탈북민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사뭇 고개가 숙여졌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이 40세를 넘기고 보니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있는 내 고향 함흥이 더욱 그립다. 못난 자식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은 늘 마음 한 구석에 있다. 가족과 함께 제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 고향 함경도에 있는 백두산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오는 통일의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내 조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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