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는 김정은의 신년사
김정은은 자기 부친과 달리 2013년부터 직접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2015년까지는 오전 9시 전후로 발표하던 신년사를 2016년부터 정오에 발표했다. 올해 신년사를 발표하는 김정은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양복차림이었다. 양복을 즐겨 입었던 조부 김일성을 따라 권위적인 이미지 정치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인민경제 여러 분야에서 이룩한 휘황찬란한 업적을 소개했다.
그러나 당 7차 대회에서 제시한 인민경제 5개년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어떤 수치나 내용을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공화국의 핵 강국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의 마감단계, 선제공격능력 등을 언급하며 핵개발의지를 표명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자신의 자책을 곁들었는데 이는 예전의 김일성 신년사에서는 전혀 없었던 광경이다. 인민들에게 ‘애민지도자’의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남북관계 경색 책임을 일방적으로 남한에 전가하면서 남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에 대한 비방 중상을 한 것도 다소 눈길을 끌었다. 탈북민인 필자도 겪었지만 북한주민들에게 신년사는 정말 반갑지 않은 사상학습 자료이다. 전체 인민이 1월 한 달은 신년사 공부에 강제로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1월 초 ‘통일연구원’을 찾아 탈북교수 출신의 현인애 객원연구위원을 만나 김정은의 신년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들어봤다.
- 먼저 북한에서의 경력을 말해 달라.
1957년 평양의 군인가정에서 6형제의 맏이로 태어났으며 1979년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했다. 당시 군인인 아버지가 함경북도 주둔 부대로 발령이 났고 나는 나진해운대학 철학교원(교수)으로 배치 받았다. 10년 뒤 청진의학대학으로 인사이동을 하였으며 20년간 대학교단에서 철학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 고난의 행군시기를 어떻게 기억하나.
1990년대 중후반에 있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청진의학대학에서는 교원 본인들에 한에서 옥수수쌀이라도 배급해주었다. 나를 비롯한 가족이 달린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당국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았다. 사회주의 노선이 잘 못되었는지? 아니면 노선은 잘 되었는데 우리가 그 이행을 잘 못하는지? 등이 의문스러웠다.
- 탈북을 결심한 계기와 시기는.
남편이 1980년대 소련(지금의 러시아) 유학파 출신이었다. 1998년 영문도 모르게 남편이 보위부에 끌려가 연락두절이 되었다. 면회는 고사하고 평생토록 행방을 알 수 없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거나 사형된 걸로 추정한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로 소련유학파 출신 군인들이 무더기로 숙청되던 시기였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끌려 간 것을 목격한 두 아들(당시 12세, 15세)은 청진을 벗어나 전국에 떠돌이(방랑아)로 살았다. 그러던 중 온갖 시련을 겪으며 2001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에서 3년을 숨어 지내던 아들이 브로커를 보내 나를 중국으로 불렀다. 2004년 두만강을 넘었고 그해 7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 남한에서 처음 무슨 일을 하였나.
자본주의국가에서 돈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돈 벌이에 욕심을 냈다.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하이리빙 다단계사업에 몸을 들이밀었다. 남보다 열심히 3~4개월 해보니 고개가 가로 저어졌는데 돈을 벌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내 돈이 나갔다. 2005년 8월부터 요리학원을 다녔고 음식점을 해볼 생각을 하였으나 이듬해 접었다.
- 정착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해서 돈만 많이 벌면 되겠지 했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그렇지 않았다. 명색이 북한에서 대학 교수였다는 인텔리가 남한에 와서 식당일이나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다.
- 탈북민단체에서 사회활동 했는데.
2008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탈북민 출신인 김승철 대표가 운영하는 ‘북한개혁방송’에서 기자 및 방송원으로 5개월간 활동했다. 이후에는 NK지식인연대 부대표로 2014년까지 활동했다. 림일 작가도 2기 이사였으니 잘 알겠지만 NK지식인연대는 탈북엘리트들의 대표적 시민단체이다.
- 그 당시 미국연수를 가지 않았나.
2013년부터 1년간 워싱턴에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개인적으로 미국정부가 북한인권을 위해 적어도 대한민국정부 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귀국이후 청주대학교 객원교수로 6개월간 근무했고 2015년부터 현재 이곳 통일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성과는.
김정은 독재정치 하에 있는 북한주민들의 인권개선과 탈북민들의 권익 등을 위해 노력한 점이다. 국제사회에서 탈북민들이 참여하는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한 갖가지 행사들이 많이 진행되었는데 정말 잘했다고 본다. 김정은 정권은 남한에서 떠드는 소리보다 국제사회에서 떠드는 소리에 더 민감하게 의식한다.
- 실패한 것은 뭐라고 보나.
개성공단폐쇄다. 남북이 한반도평화와 번영을 위해 어렵게 만들었던 개성공단인데 이를 폐쇄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고 본다. 개성공단 5만명, 그 가족까지 20만의 생계가 끊긴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성공단을 통해서 북한으로 퍼지던 한류열풍이 끊긴 것이다. 개성시민들의 마음에서 자유의 희망이 사라졌다.
- 남북하나재단 이사로 임명되었다.
지난해 11월 1일 임명되고 가장 먼저 림일 작가의 축하 문자를 받고 조금은 쑥스러웠다. 남북하나재단 이사는 재단이사장이 추천하고 통일부장관이 임명하는 공직사회 명예직이다. 나와 함께 탈북외교관 출신으로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근무하는 현성일 박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3만 탈북민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라고 본다.
- 주로 어떤 일을 하나.
비상근 이사다. 회의가 있을 때에 참여하는데 재단의 계획이나 사업구상에 탈북민들의 뜻이 전달되도록 노력한다. 두 사람 모두 북한연구자 출신인데 탈북민들의 심정을 제대로 반영하겠나? 하는 우려도 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다. 정기 이사회는 1년에 2회, 임시이사회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린다.
- 탈북민들이 재단을 많이 비난하던데.
비난보다는 비판을 해야 좋은 것이다. 막말로 일부 탈북민들은 재단예산 250억 과반이 건물관리비, 행사홍보비, 직원들 인건비 등으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자. 그래도 그중 100억을 탈북민들을 위해 써도 그게 어딘가? 재단이 없어져 탈북민들이 1전도 지원 못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 새해 소원이 있다면.
3만 탈북민들이 남북하나재단(이사장 손광주)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재단은 우리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누구나 어떤 일에 대해서 욕은 하기 쉽지만 정작 본인이 그렇게 일하라면 못하는 것이 우리민족 개인의 근성이기도 하다.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이 진짜 통일준비다. 여기에 이북도민사회도 탈북민과 함께 통일준비에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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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애 연구위원은 2017년 1월 1일 김정은의 올해 신년사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해를 보냈는데...”와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과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을 믿고 전체 인민이 앞날을 낙관하며 ‘세상에 부럼 없어라’의 노래를 부르던 시대가 지나간 역사속의 순간이 아닌 오늘의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헌신 분투할 것” 이라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새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비록 TV매체를 통해 형식적이지만 자기비판을 조금이라도 한 것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올해로 다섯 번째인 그의 신년사에서 그동안 했던 인민생활 향상 약속 중에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북한주민들은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그의 신년사를 빈말이라고 믿는다.
그런 무지몽매한 북한주민에게 어떻게든 자기가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일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특별발언’도 했을 거라고 본다. 북한당국이 ‘세상에 부럼 없어라!’고 말하던 때는 옛 동유럽국가에서 경제지원을 받던 1970년대 한 때였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외부의 지원 없이 빈곤하게 사는 북한이 무슨 힘으로 경제수준을 끌어 올린단 말인가? 그리고 1970년대는 흘러간 과거다. 첨단을 달리는 2020년을 가까이 하는 이 시대에 50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가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김정은의 신년사는 알맹이가 없는 하나의 빈말연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정도인데 말 못하는 북한주민들의 심정은 오죽하겠냐”는 현인애 연구위원의 쓴소리는 당연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