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단체 단결의 첫 쾌거를 이루다
올해 1월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 200여 명이다. 이는 많고 적음을 떠나서 70여년간 계속되는 김 씨 수령일당의 참혹한 북한정권을 뛰쳐나온 용감하고 정의로운 탈북민들로 이들은 2천만 북한주민들의 대표다.
남한에 들어온 3만 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로 한반도 자유민주통일의 선구자들이 틀림없다. 김 씨 수령과 조선노동당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북한주민에게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니 김정은 정권에는 가장 불편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1953년 7월 휴전이후 생긴 60여 년의 탈북민 역사에 오늘까지 100개 안팎의 탈북민단체가 존재한다. 단체의 특성과 목적이 다소 달라도 궁극적으로 북한독재정권을 비판하거나 탈북민들의 권익쟁취, 정착논의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난해 탈북민 사회에서 눈에 띄는 이변이 생겼다. 33개의 각종 탈북민단체가 하나로 결집하여 북한인권개선을 위해 한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이는 탈북민사회 뿐만 아니라 남한사회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얼마 전 최초의 탈북민단체 연합결성체인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연합’(이하 단체연합)의 상임대표를 맡은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를 만나기 위해 서울 모처에 있는 자유북한방송국을 찾았다.
- 고향과 가족에 대해 소개해 달라.
1962년 6월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일성종합대학의 첫 창작지도 교수 겸 1958년까지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시인 김순석 선생이다. ‘벼 가을하러 갈 때’ ‘황금의 땅’ 등 3천여 편의 시를 썼다. 1959년 8월 종파사건의 여파로 평양에서 추방되어 평북 희천에서 살았고 내 위로 누이 5명이 있다.
- 인민군 대위 출신이던데.
1978년 인민군에 입대하여 황해도 주둔 4군단 28사단에서 군사복무를 했다. 입대 후 5년 뒤 조선노동당원이 되었다. 1988년에 군(軍)위탁생으로 평양의 김형직사범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하고 1992년 620훈련소 예술선전대 작가로 임명되었다. 군사칭호는 소위계급. 여기서 1996년까지 복무하였으며 최종계급은 대위였다. 비교적 빠르게 진급했는데 그만큼 당과 수령에게 충성했다.
- 남한에 대해 어떻게 알았나.
사병생활 10년간 대북삐라를 자주 접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남조선의 자동차 1.000만대 시대상황, 서울여의도 광장에서 있은 부처님 오신 날 행사사진, 최주활 인민군 상좌(현 탈북자동지회 회장) 귀순사진 등이다. 그걸 보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마음에 가득 찼다. 군관(장교)이 되서는 대북방송을 많이 청취하였다.
- 그 때는 무엇을 알았나.
김일성, 김정일이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나쁜 거짓말쟁이’ 임을 알았다. 2천만 인민의 고혈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독재정치를 이어가는 독재자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때 심정은 정말 허탈했다. 당시 KBS사회교육방송을 자주 들었는데 여기서는 수령의 허구성과 역사조작 및 날조 등을 알았다. ‘역사의 진실’ ‘노동당 간부들에게’ 등의 프로그램을 애청하였다.
- 탈북경로를 말해 준다면.
세상의 진실을 알고 나니 김정일 독재정권에서 인민군 대위가 아니라 대장(4성 장군)으로 살아도 한갓 노예이고 벌레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았다. 하여 1996년 가을 부대를 탈영하여 중국으로 밀입국했다. 이듬해 2월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 중 탈출하여 중국에서 3년 고생 끝에 1999년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 서울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평양의 김형직사범대학 시절 시(時)를 전공했기에 서울에서 한국문학의 기준으로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 있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공부를 하였다. 이후 황장엽 선생의 요청으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회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 자유북한방송에 대해 소개해 달라.
북한주민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해 탈북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2004년에 개국하였다. 기자,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직원 7명이 모두 탈북민이다. 자유북한방송국을 만든 목적은 북한의 수령 독재 정권아래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 2천만 인민에게 남한의 소식을 사실대로 알려주기 위해서다. 또한 폭압적인 김 씨 수령의 독재정치를 세상에 낱낱이 폭로하기 위함이다.
- 많은 시련을 겪은 줄 안다.
림 작가도 탈북민이니 잘 알 것이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겠나? 탈북민들의 소액 후원금으로 운영하자니 벅찬 것이 현실이다. 한때 미국의 NED(민주주의진흥재단)를 통해 지급되는 연방정부의 지원금, 유럽연합의 재정지원을 다소 받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종교단체의 기부금에 의존해서 힘겹게 유지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이북도민사회의 지원도 있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 어떤 때 보람을 느끼는가.
2008년 국경 없는 기자회 매체상, 2009년 대만민주화기금 아시아민주인권상을 수상했다. 국내외 각종 행사에서 자유북한방송 운영과 관련한 표창과 시상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3만 탈북민들이 받는 영광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한에서 우리 자유북한방송을 듣고 탈출한 후배들을 서울에서 만날 때 제일 기쁘다.
- 이번에 단체연합이 만들어진 과정은.
탈북단체장들 속에서 예전부터 새로 출범할 북한인권재단의 바른 활동을 기대하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자칫 남한사람들의 밥그릇 자리로 전락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우리들이 의견을 모아 통일부에 제출하자는 말이 나왔으며 그러기 위해 탈북단체가 하나로 결집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봤다. 발기는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가, 주도는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장이 했다.
- 자세히 말해 달라.
작년 8월 말 북한민주화위원회에서 1차 모임을 가졌고 10명의 단체장이 참석했다. 9월 중순에는 수도권에 있는 모 펜션에서 2차 모임이 있었고 25명의 단체장이 참석했다. 3차 모임은 9월 25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식으로 이뤄졌고 단체연합이 공식 탄생했다. 행사비용은 각 단체에서 일정금액씩 지불했다.
- 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렇다. 지난 1999년도에 생긴 합법적인 모 탈북단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0개 안 밖의 단체가 존재한다. 물론 그 중에 관변단체도 한두 개 있으나 전부 영세한 시민단체라고 보면 된다. 100개 단체가 적고 많고 떠나서 일을 하는데서 전혀 단합이 안 되었다. 개성이 강한 북한사람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보면 이번 단체연합 출범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 상임대표로 선출된 이유가 있나.
추대 형식으로 되었는데 아마 이 일을 추진하는데서 내가 적임자로 적합하다고 탈북단체장들이 입은 모은 듯하다. 내가 현재 맡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 운영만도 힘에 겹지만 어쩌면 이 일도 반드시 우리 탈북단체장 중에 누군가 나서 주도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 단체연합이 주장하는 의견은.
작년 국회에서 있은 북한인권법 통과에 가장 큰 공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바로 탈북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당사자인 탈북민들을 외면하고 북한인권법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채용해 그들의 새 일자리 창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의적인 북한인권을 핑계로 자기들만의 또 다른 직업창출사업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재단이사 및 직원의 절반을 탈북민들로 꾸려야 한다고 본다.
- 첫 액션이 있었다.
우선 작년 9월 통일부 산하 북한인권기록센터 현판식이 있었다. 이때 통일부장관을 만나 우리들의 의사를 서류형식으로 전달하였다. 다음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 31일 오후 3시 통일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 후문에서 300여 탈북민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갖고 ‘북한인권재단’에 탈북민 참여를 강하게 요구했다.
- 끝으로 요즘 시국을 어떻게 보나.
박근혜 정부가 잘 한 것은 북한 김정은 독재정권에 대한 강력한 제재이다. 또한 북한주민들에게 “자유를 찾아 남으로 오라”고 했으며 3만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불러 준 것이다. 나머지 국내정책에 대한 평가는 노코멘트하겠다. 하루빨리 혼란한 현 시국 바르게 정돈되고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는 보다 건실하고 정직한 정부였으면 한다. 거기에 대북정책은 안보위주의 냉정함을 가졌으면 한다.